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페르디난트 (문단 편집) == 사후 ==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묘는 본래 [[카푸친 교회|오스트리아 황실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아내 조피가 위에서 말한 신분 문제 때문에 황실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계모인 [[마리아 테레자|마리 테레제]]가 나서서 황실 묘지에 프란츠를 혼자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조피와 함께 안장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여서 페르디난트 부부의 묘는 황태자의 별장 하오스트리아 지방의 바카우 계곡 근처에 있는 아르트스테텐(Artstetten) 성 지하에 함께 안장되었다.[* 자식과 손자들도 함께 매장되어 있다.] 황태자 부부의 장례식은 합동으로 치러졌는데, 원래 황실에서는 조피의 관을 남편보다 15인치가량 낮은 자리에 두고, 그 위에는 [[시녀]]를 상징하는 장갑을 놓으려 했지만 뜻밖에도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를 저지하고 나선 덕에''' 평범하게 합동 장례식을 치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사후 그의 뒤를 이어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계자이자 차기 황제가 된 건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장남 [[막시밀리안 폰 호엔베르크|막시밀리안]]이 아니라 조카인 [[카를 1세]]였다. 귀천상혼으로 그의 아들은 후계자가 될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오스트리아 황실은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자녀들이 오스트리아 황실 소속이 아니라 조피가 하사받은 칭호인 호엔베르크 가문이라는 핑계로 연금 지급까지 거부했다. 물론 프란츠가 물려준 유산은 적지 않았지만, 대부분 토지 등 [[부동산]] 형태라서 정작 당장 쓸 수 있는 현금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페르디난트의 자식들에게 동정적이었던 일부 인사들이 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특히 이들의 계조모인 [[마리아 테레자|마리 테레제 대공비]]가 나서서 황실에서 프란츠의 자녀들을 돌봐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본인의 연금을 대신 주고서라도 보호하겠다고 항의했다. 당시 황실의 여성 중에선 마리 테레제가 가장 지위가 높아서[* [[프란츠 요제프 2세]]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는 암살당했고 황제의 바로 손아래동생인 [[막시밀리아노 1세|막시밀리안 대공]]의 아내인 [[벨기에의 샤를로트]]는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한 후 정신병에 걸려서 [[벨기에]]에서 오빠 [[레오폴드 2세]]에 의해 유폐당했다가 1927년 사망했다. 손윗 동서들이 차례로 불행하게 죽으면서 사실상 마리 테레제가 황실 내 최고 어른이었다.]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황실에서 연금을 되돌려 주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황실이 해체되면서 부동산이 여러 독립국들로 쪼개지고 재산 대부분을 몰수당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자녀 중 아들들인 막시밀리안과 에른스트는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에 반대하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고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야 석방되었다. 페르디난트의 암살로 공석이 된 제국군 총감찰관직은 톄셴 공가의 수장인 [[프리드리히 폰 외스터라이히테셴]] 대공이 이어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